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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산티아고 순례길[프랑스길]

[2016/06/04] Day 2, 주비리에서 동행을 얻다

둘째날이 밝았다.

5시에 일어나자고 했었는데,

나는 밤새 뒤척이다 결국 4시 반에 깼다.

 

아무래도 모든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 자다보니, 예민해지는 건 사실이다.

생장에서도, 론세스바예스에서도 충분히 자지 못했는데도,

그나마 긴장을 해서 그런지 피곤함을 잊었다.

 

순례길의 모든 숙소는 혼성 믹스돔이기 때문에

내가 잠귀가 밝든, 예민하든, 모든 것은 사치!

얼른 이 숙소 문화(?)에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

 

상쾌하게 씻고 빨래를 걷으러 건조대가 있는 지하로 내려갔는데

이.럴.수.가!

바삭바삭 말라 있을 거라 생각했던 옷가지에

밤새 내린 비 + 아침 이슬이 축축하게 내려앉은 것이다.

 

순례길을 준비할 때,

순례자들이 마르지 않은 빨래를

배낭에 주렁주렁 매단 채로 걷는 사진을 보았는데

그것이 나에게 현실이 되었다.

 

축축한 빨래를 들고 올라와서는

한국에서 챙겨온 여분의 운동화 끈을 건조대 삼아

배낭에 주렁주렁 매달았다.

휴대전화 손전등으로 빛을 비춰가며 배낭을 챙겼다.

 

주위를 둘러보니,

한국인 두 명을 포함하여 부지런한 순례자들이 보였다.

배낭이 내 것의 두 배는 되어보이는 한국인 순례자들과

잠이 덜 깬 채로 몇 마디를 나누었다.

'딱 봐도 나보다 어려보이는데, 역시 체력들이...'

 

여행하면서 꼭 하나씩은 무언갈 빠뜨리며 다녔기에

(의도하지 않게 '기부천사'되고 있다.)

마지막까지 꼼꼼하게 점검했다.

 

아침식사를 위해 자판기에서

먹물리조또와 정체 모를 음식을 뽑아 먹었는데,

윽! 완전 입맛 버렸다.

그래도 허기지지 않도록, 꾸역꾸역 욱여 넣고는

7시가 좀 안 되어 발걸음을 재촉했다.

 

 

 

밤새 내린 비에

마을은 촉촉하게 젖어있었고,

공기는 너무나 상쾌했다.

어제의 여파로 발, 어깨가 좀 아팠지만

기분이 정말 좋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숲길을 걷고 있자니,

힘든 것보다 행복한 마음이 더 크다.

 

 

'난 운이 좋다.

살아오면서 좌절할 만한 일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큼직큼직한 인생의 관문들은

한 번의 실패없이 통과하였다.

그러다, 작년에, 나는 직장에서 모든 사람들이 꺼리는 힘든 일을 맡아 한 데다가

이로 인해 온 몸이 아팠고,

원하는 지역으로 직장을 옮기기 위한 시험을 준비하느라

몸과 마음이 완전히 지쳤다.

이 모든 고생을 보상받고자

올해 초부터 줄기차게 여행을 다녔다.

중국 상해,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그리고 지금의 산티아고 순례길까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행복감에 젖어,

Y씨와 나는,

"오늘 컨디션도 좋은데

오늘의 목표지점인 주비리(Zubiri)를 넘어

다음 마을까지 가보자"며

거만을 떨었다.

 

그러나, 주비리에 다다랐을 때쯤

우리는 매우 지쳐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버렸다.

"더 이상은 못 걷겠다...!"

 

그 찰나에 한국인 남성 한 분(L씨)을 만났다.

그렇지 않아도, 동행이 좀더 늘었으면 하고 있었는데,

L씨의 푸근한 인상과 재치 덕에,

짧은 사이에 많은 대화가 오고갔고,

우리는 금세 친해졌다.

 

우리 셋은 함께 숙소를 찾아 들어가게 되었다.

어제와는 달리 사설 알베르게다.

 

 

베드 넘버, 규칙, 와이파이 등을 안내받고선

당장 먹을 점심과 내일 아침거리를 사기 위해

배낭만 숙소에 두고 곧바로 나왔다.

 

점심은 숙소 앞 레스토랑에서 브런치메뉴와 치킨윙, 피자를 먹었는데

오! 기대하지 않았는데 나름 든든했다.

 

그 후 마트에 가서 저녁으로 먹을 맥주,

아침으로 먹을 토스트, 참치, 치즈, 요플레 등을 샀다.

 

숙소에 돌아와서 씻고 상쾌해진 기분으로

로비에서 많은 순례자들과 이야기 나누었다.

 

이탈리아에서 온 남성, 호주에서 온 2명의 여성 등.

다양한 끼를 가진 순례자들과

소소하지만,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동행이 한 명 추가되어

앞으로의 순례길이 훨씬 더 재미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