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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산티아고 순례길[프랑스길]

[2016/07/01] Day 29, 먹방 in 아르주아

새벽 어스름.

인기척에 눈을 뜨니

P씨가 방문이 안 열린단다.

"응...? 무슨 소리야?"

침대에서 기어나와

문으로 다가가 열기를 시도하는데,

어, 진짜 안 열린다.

 

문이 고장이 난 건지

아예 문고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에이, 하다보면 열리겠지-'

 

 

우리는 번갈아가며 문 열기를 시도했지만

계속해서 열리지 않는다.

화장실이 급하다던 P씨는

그냥 자야겠다며 다시 눕는다.

 

아침이 완전하게 밝아오고,

다시 한번 우리는

문 열기를 시도하는데, 여전히 안 열린다.

점점 초조해졌다.

게다가 이곳은 옥탑방이라

도와주러 올 사람도 없다.


P씨가 용기내어 큰 소리로

도와달라고 구조 요청(?)을 한다.


한참 응답이 없다가 

어떤 남성 순례자가 3층으로 올라온다.

우리는 문 너머로 그에게

현 상황에 대해 이야기한 뒤

문 아래 틈새로 열쇠를 건네준다.

 

"Thank you soooooo much!!!"


남성 순례자의 도움으로

겨우 방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이곳, 팔레스 데 레이에서

하루 사이에 진짜 별의 별일을 다 겪는다.

도시 자체의 특징보다는

여기서 한 경험들 때문에,

이곳을 절대 못 잊을 것 같다.

 

알베르게 지하 식당으로 내려와

어제 사둔 음식, 남은 샐러드, 요플레 등으로

배를 빵빵하게 채우고,

오늘 걸어야 할 거리가

28.8km로 꽤 먼 거리이기에

동키서비스로 배낭을 부치고, 출발!

 

산티아고까지 여정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길에 순례자들이 꽤 많다.

우리는 손을 잡고 빠르게

수많은 순례자들을 지나쳐 간다.

 

곁눈질로 본 순례자들 중 몇몇은,

다리도 하얗고,

배낭 및 옷의 상태가 매우 깨끗하다.

분명 걸은지 얼마 되지 않았으리라.

꼬질꼬질해진 우리의 몰골이

새삼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우린 생장에서부터 걸어왔다구!'

 

문어 요리인 뿔뽀(Pulpo)가 유명하다는

멜리데(Melide)의 바로 전 마을에서,

주린 배를 달래기로 한다.


나름 빠르게 걸어와

수많은 순례자들을 제쳤다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도착한 식당 Taberna do Farruco에는

벌써 많은 순례자들이 아침 식사를 하고 있기도,

또는 이미 먹고서 배낭을 다시 짊어 진 채

떠날 채비를 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버거 세트 두 개와

고추 튀김(Pimientos de Padron)을 주문하고선

주변 순례자들과 인사도 나누고

그들의 유쾌한 모습에 깔깔 웃기도 한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버거는 아주 평범해보이지만

나름 먹을만 하다.

 

고대하던 고추 튀김의 맛은?

소금을 너무 많이 쳐 놓아서

접시에 탈탈 털은 다음 입에 넣는다.

이거, 묘하게 중독되는 맛이다.

단시간에 모든 메뉴를 클리어하고선,

아르주아(Arzua)를 향해 다시 발걸음을 뗀다.

 

한참 숲길을 걸어가는데

한쪽 다리가 불편하시지만,

운동으로 다져진 딴딴한 몸의

어떤 아저씨가 보인다.

테이블 하나를 놓고 서서

순례자 여권에 열쇠고리를 붙여주신다.

 

 

가격은 1인 당 2유로이지만,

가치는 그 이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야말로 까미노에서

전무후무한 레어템이란 생각에

우리는 4유로를 내고

순례자 여권에 열쇠고리를 달았다.

(아저씨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있긴 했다.)

 

 

어느덧 아르주아 표지판이 보이고,

한참을 걸어간 뒤에야

가운데 도로를 중심으로

양 옆에 건물이 주욱 길게 늘어선

거리로 진입한다.

우선 동키서비스로 보낸 배낭을 찾고,

또 다시 조용한 알베르게를 찾아 나선다.

 

알베르게와 바(Bar)가 한쪽 건물에,

붙어있는 또 다른 건물에는

리셉션과 주방이 있는

커다란 알베르게에 묵기로 한다.

  

묵는 사람이 많지 않고,

무엇보다 화장실에 욕조가 있다.

오랜만에 뜨뜻한 물에 몸을 담그며

반신욕을 즐긴다.

노곤함이 다 풀리는 듯하다.


씻고 나오니,

P씨가 오늘도 요리사를 자처한다.

'이렇게 받기만 해도 되나'

FROIZ라는 대형 마트에 들러

저녁으로 먹을 오겹살과 알리오올리오 재료,

간식 및 아침거리를 잔뜩 사서 돌아왔다.


(멘토스 초코맛을 처음보고는 신기해서 찍음)



원래도 좋아하긴 했지만,

까미노에 와서 초콜릿 중독의 정도가 더 심해진 나는

알베르게 주방에 장 봐온 것을 내려놓자마자

초콜릿 음료부터 마신다.

꾸덕꾸덕한 게 분유같기도 하고...



배도 안 고픈지 군것질조차 하지 않고

 P씨는 요리에 돌입했다.

팔라스 데 레이에서 라면 사건으로

그에게 한바탕 깨진 나는

'내 주방에 출입 금지야'라는 그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아

선뜻 나서서 돕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도 그런 나를 눈치 챘는지

이따금씩 내게 일거리를 던져준다.


"마늘 좀 썰어 줄래?"

"응, 그래!!!!!!!"



꿀에 절여진 채 익어가는 오겹살이

너무나도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음식 하나를 만들어도

엄청나게 혼과 공을 들이는 그가

이제는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드디어 완성된 꿀 절인 오겹살!

먹기 좋게 잘라 접시에 담는다.



그는 재빠르게 면을 익히고,

올리브 오일, 후추, 소금 등으로

심심하게 간을 하여

알리오올리오를 만들어낸다.



드디어 모든 메뉴가 준비되었다.

맛있게 먹을 '입'도 준비 완료!



고기도, 파스타도 완전 맛있다.

파스타의 양이 워낙 많아서

결국 남기긴 했지만,

나중에 두고두고 아쉬울 정도로

너무나도 취향 저격의 맛이었다.



우리는 후식으로 마트에서 사온

초코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아까 분명 배가 부르다 했는데,

어릴 적부터 '밥 배'와 '후식 배'를

따로 키워온 나로서는

이 상황이 넘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소화시키기 위해 거리로 나선다.

아르주아는 그리 작은 도시는 아니지만,

텅 빈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거리를 걷다가

다양한 기념품을 판매하는 가게가 있기에

쇼윈도를 통해 잠시 구경한다.


P씨가 까미노를 상징하는

조개껍데기 모양의 목걸이를 발견하고는

나에게 어울릴 것 같단다.

악세사리에 큰 관심이 없는 나는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는데,

그는 커플 목걸이를 사면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물론 나쁠 거야 없지!'라는 생각에

가게로 들어가 주인에게 물어보니

똑같은 상품은 없고 비슷한 상품이 있단다.

초록빛이 도는 목걸이 하나,

푸른빛이 도는 목걸이 하나를 샀다.



까미노 팔찌에 이어 벌써 커플템이

두 개나 생겼다.


행복한 마음을 안고 알베르게로 돌아온다.

29일차 밤이 저물어간다.


사랑이 넘치는 까미노.

행복이 넘치는 까미노.


이제 4일 뒤면 한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하, 대책없는 것도 잘 알지만

미리부터 생각하지 않으련다.

그저 시간이 조금이나마 천천히 흘러가기만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