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산티아고 순례길[프랑스길]

[2016/06/30] Day 28,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팔라스 데 레이에서의 하루 (1)

아침에 눈을 뜨니,

창문 너머로 보이는 기이한 풍경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안개가 마을을 통째로 집어 삼킨 듯

온통 하얗게 변해 있었다.

호수의 물결조차 잔잔한 지금,

시간이 잠시 멈춘 것만 같다.




한참을 감탄하며 감상하다보니

서서히 안개가 걷히기 시작한다.


어김없이 순례복으로 환복하고선

바깥에서 들어오는 찬 기운에 잔뜩 쫄아

각자가 가진 바람막이 또는 패딩을 한껏 껴입는다.


오늘의 목적지는 팔라스 데 레이(Palas de Rei).

26km 남짓한 거리를 걸어야 한다.


걷다 보니 출출해진 우리는

허름한 바를 발견하고는

아무런 기대없이 테이블에 앉는다.




P씨의 표현에 따르면,

'굉장히 음식 솜씨가 좋아 보이시는' 주인 아주머니께서

수제 치즈가 들어간 샌드위치와

햄치즈 샌드위치를 추천해주신다.

우리는 아주머니를 믿고 그대로 주문한다.




샌드위치가 나왔다.

비주얼은 완전 평범 그 자체다.


그런데, 달랑 수제치즈 하나 들어간

샌드위치의 맛을 보는 순간,

수제 특유의 맛과 향이 나를 사로잡았다.


솔직히 대놓고 맛있지는 않은데,

먹을 수록 묘한 것이, 자꾸 먹게 된다.

치즈가 큰 데다가 워낙 짭쪼름해서

빵을 먼저 다 먹어버렸다.

결국 치즈를 한입 크기정도 남기고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휴식 후 걷기 시작하는데

컨디션이 좋은 우리는

까미노 초반에 보였던 미친 속도를

다시 한번 재현하기에 이른다.


그런데...무리한 탓일까?

발의 통증과 함께 현기증이 난다.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위기에

에너지 넘치는 P씨를 앞세운 채

나는 무표정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를 눈치 챈 P씨는

곁에서 끊임없이 나를 격려하지만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나는

얼굴을 더 굳혀버린 채

혼자만의 시간을 갖겠다며

'나 자신과의 싸움'을 선포한다.



그러다 순례자를 위한 쉼터를 발견한다.

그곳에선 간단한 식음료와 스탬프를 제공하고 있었다.

우리는 배낭을 잠시 내려놓고 쉬기로 한다.


이때, P씨가 쉼터 한 켠에 놓인 기타를 들더니

나를 마주보고 앉은 채

달달하게 연주와 노래를 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주변의 시선이 신경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P씨가 지금!

너무 멋지고! 고맙다는 거다.


아까의 어두웠던 나를 반성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P씨에게 마구 티내면 안 되는 거였는데...




우리는 다시 힘을 내서 즐겁게,

팔라스 데 레이에 진입한다.

마을 표지판이 나온 뒤로,

길쭉하게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걷다보니

공립 알베르게를 포함하여

두어개의 알베르게가 보인다.


그러나 팔라스 데 레이의 중심부는

2km정도를 더 걸어가야 나온단다.

우리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어

드디어, 마을의 중심부에 들어섰고,

발품팔아 이곳 저곳을 돌아보다

규모도 크고 세련되어 보이는  

Albergue San Marcos로 들어선다 .


이곳 역시 다인실과 3인실이 있단다.

우리는 고민끝에 옥탑에 위치한 3인실을 택했다.

돈은 조금 더 주더라도 잠은 잘 자야하니까!


P씨가 오늘은 직접 요리를 해주겠단다.

이름하야 칠면조 요리!

우리는 근처 대형 마트에서 갖가지 재료를 사서

지하에 마련된 알베르게 주방으로 내려왔다.






칠면조 요리가 완성되기까지

시간이 좀 필요하기에

우리는 그저께 포르토마린 가는 길에 샀던

라면을 먼저 먹기로 한다.


매운 음식을 맛보지 못한지

어언 한 달반이 된 나는

불닭볶음면 컵라면에 물을 붓는 순간부터

군침이 돌기 시작한다.


P씨는 봉지라면을 샀기에

작은 냄비에 물을 올려 끓이고 있다.

그가 칠면조 요리하랴, 라면물 끓이랴

(내 기준으로는) 정신이 없어 보여서

물이 끓자, 라면 스프와 면을 넣어주었다.


그.런.데!

그런 나를 보며 경악을 금치 못하는 P씨.

알고보니 자타공인 쉐프, P씨는

라면을 끓일 때,

면을 먼저 끓이고 찬물에 헹구어

다시 스프와 함께 끓인단다.


그를 몇 주간 지켜봐온 나는

그가 음식을 만드는 것, 먹는 것에 대해서는

남다른 철학(?)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버럭 화를 내며

'오랜만에 먹는 소즁한 라면인데 네가 망쳤다'를

나에게 호소하였다.

너무너무 미안했다.


그저 그가 모든 요리를 다 하는 것 같아

면목없는 마음에, 도와주려고 했을 뿐인데

이 사단을 내고 말았다.

나는 시무룩해진 채 그에게 거듭 사과했다.


시간이 흐르고

칠면조 요리와 계란밥을 들고

내가 앉은 테이블로 다가오는 P씨.

그의 얼굴에는 무안함과 미안함이 뒤섞여 있다.

'그렇게 까지 화낼 게 아니었는데

음식 하나 때문에 내게 화를 내었다'며

도리어 사과 하는 그.


그에게 물어보니

이게 그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화'란다.

난 그때부터 빵 터지기 시작했다.

그는 너무너무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다.

결국 우리는 어색한 분위기를 풀고

다시 달달모드로 돌아와

점심 겸 저녁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음식솜씨도 훌륭하지만,

플레이팅이 아주 끝내준다.




칠면조에는 뼈가 너무 많아서

먹기가 번거롭긴 했지만은,

맛은 담백하니 끝내줬다.

곁들여 후다닥 만든 계란밥도 완전 good!

마음씨 착한 그는 만든 음식 일부를

다른 순례자들에게 나누어준다.


한바탕 거한 저녁식사가 끝나고

우리는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채,

우리가 묵는 옥탑방이 있는

3층으로 터벅터벅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