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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산티아고 순례길[프랑스길]

[2016/06/29] Day 27, 포르토마린에서 베드로, 바오로 성인의 축일을 맞다

콘크리트길이 나를 탄력적이고도 강하게 전진하게 해준다면,

흙길은 폭신함 속에서 안정적으로 걸을 수 있게 해준다.

 

까미노 중반부는 거의 도로의 콘크리트 길이었다.

초반에 느꼈던 푸른 자연의 싱그러움은 어느새,

콘크리트의 열기와 함께 증발해버렸다.

 

오늘의 까미노는 초반의 그 싱그러움을

다시금 느끼게 해주는 촉촉한 숲길이었다.




P씨와 나는 오늘 걸어야 할 거리가 22km라는 걸 알고는

'뭐, 그쯤이야 금방 걷지'하며 천천히 출발하기로 한다.

 

사리아를 벗어나 숲길로 들어서자마자,

순례자를 위한 기부 형식의 먹거리 가판대를 발견하였다.



우리는 간식을 조금 챙긴 뒤,

동전 몇 개를 넣는 것으로 감사를 표한다.




남은 거리는 얼마 되지 않지만,

함께 걷는 이 순간이 참으로 좋다.

우리는, 늦게 나온 것도 모자라

한껏 여유를 부리며 서로의 모습을

휴대폰 카메라에 담기도 한다.




여느 때와 같이 까미노 비석을

무심코 지나쳐 가려는데,

엇, 어느새 100km도 남지 않았다.

 

남은 거리가 700km, 600km로 점점 줄어들 때는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더랬다.

동행들과 하나둘 헤어진 뒤,

P씨와 나, 단 둘의 시간이 늘어갈수록

남은 거리는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다.

 

이제는 그게, 그렇게 아쉽고 슬프다.

귀국편 비행기를 변경하려 시도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예정된 날짜에 귀국해야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남은 시간을 소중하게 보내는 것 외엔

어찌할 도리가 없다.




또 한번 먹거리 가판대를 만난다.

초반에 먹거리를 챙겨서 먹은 터라

우리는 '無맛' 레몬물로 목을 축인다.




가판대 주위에 닭 몇 마리가 돌아다닌다.

털이 아무렇게나 자라 있는

쬐그만한 검은닭이 귀여워서

쫓아다니며 휴대폰 카메라에 담기 바쁘다.

난 진짜 별 게 다 귀엽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걷고 있는데,

저 앞에 심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는 가게가 보인다.

혹시 저기가 그 한국 음식을 판다던...?



...그 가게가 맞.다.

드디어 이곳에 오다니!

P씨는 가게 입구서부터 내부에 들어서기까지

영상을 찍으며 연신 헤벌쭉이다.



P씨의 말마따나

이곳은 진짜, 와, 천국이다!

우리는 일단 진라면(봉지), 불닭볶음면(컵)를 사고는

엄청나게 벅차오른 마음을 진정시키며

가게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커플템이 아주 많다.

특히 까미노 스타일 팔찌가 많길래

이것 저것 손목에 차본 끝에

커플 팔찌를 구입했다. 아이 좋아>_<


비록 짐은 늘었지만

너무나 기분좋게 가게를 나왔다.

걷다 보니 어느새 오늘의 목적지인

포르토마린(Portomarin)에 거의 다다랐다.


포르토마린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길이 있는데

하나는 평이하지만 빙 돌아가는 길,

다른 하나는 위험하지만 빠른 길이다.


우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위험하지만 빠른 길을 택한다.


발을 헛디디기 쉬운,

걷기 좋지 않은 길이긴 하지만

조심조심 걸으니 괜찮았다.



예쁜 돌담길이 있기에 잠시 멈춰선다.

(저 멀리 보이는 마을이 바로 포르토마린이다!)



이제 다리만 건너 가면 포르토마린인..데...

와, 여기 완벽한 포토존이다!!!

마침 지나다니는 차량도 거의 없어

한참동안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은 한동안 카톡 프로필 사진이 되었다.)


긴 다리를 건너가니

멋드러진 시계탑이 보이고,

시계탑을 끼고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걸어가니

포르토마린 특유의 블랙&화이트 건물이 우릴 맞이한다.


알베르게가 꽤 많다.

그러나 우린, 사람이 북적이지 않는

프라이빗하면서 조용한 곳을 원하므로

어느 알베르게 주인에게 물었더니


중심가에서 10분정도 걸어가야하지만,

조용하고 시설 좋은 알베르게를 추천해준다.



전망이 끝내주는 이 곳에 묵기로 결정!


오늘 걷는 동안은 별로 힘들지 않았는데,

막상 도착하니 둘다 넉다운되었다.

얼른 씻고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가야하지만,

무거운 두 눈을 이기지 못하고

낮잠의 유혹에 빠져든다.


'아, 너무 배고파서 안되겠다.'


한참을 자다가

우리는 점심 겸 저녁으로 주린 배를 달래기 위해

중심가로 향한다.

이곳 저곳 레스토랑을 둘러보지만

P씨의 마음에 드는 곳이 없나보다.

난 그의 안목을 믿기에

졸졸 따라다닐 뿐.


그러다 강 근처의 O Mirador라는 이름의

고급레스토랑 앞에 멈춰 선다.


P씨는 본인 어머니께서

고급 음식으로 잘 먹고 다니라 하셨단다.

'그래, 비..비싼 만큼 맛있겠지!'


우리는 오늘도 고기를 먹는다.


미식가 P씨는 등심, T-bone 스테이크, 꽃등심 등

나에게 음식에 대해 설명하기 바쁘다.

잘 모르겠지만, 송아지 고기를 제외하고는

내 입맛에 모두 맞았다.


알고보니 이 레스토랑,

Tripadvisor에서 포르토마린 맛집이다.


너무너무 만족스럽게 식사를 하고는

축제의 분위기에 한껏 취한 도시를

여유롭게 거닐기로 한다.




시내의 중심 광장에서

악기 연주가 한창이다.


계단에 아무렇게나 앉는다.

P씨의 어깨에 기대어

흥겨운 연주를 감상한다.

고급스런 음식, 장소보다도

바로 이런 소소한 것들이 진짜 행복이다.


한참 연주를 감상하다

마트에서 내일 먹을 간식을 사고는,

촉촉한 밤공기를 맞으며

알베르게로 돌아와

세상에서 제일 달콤한 잠에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