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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산티아고 순례길[프랑스길]

[2016/06/30] Day 28,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팔라스 데 레이에서의 하루 (2)

알베르게 지하 주방에서

애피타이저로 라면과

메인으로 칠면조 요리를 먹고선

빵빵해진 배를 어루만지며

침대가 있는 3층으로 올라간다.


너무 배불러서 안 되겠다며

좀 걷고 오자는 말에

'너 혼자 가'라는 P씨.

이에 괜히 심술이 난 나는

'나 진짜 가?'라고 묻는다.

무슨 마음에서인지 그는

'응. 가 버려'란다.


가버리라고? 하..

라면을 잘못 끓인 실수때문에

안 그래도 마음 한켠에

속상함이 남아 있던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알베르게 밖으로 나왔다.


출처 : http://alberguesanmarcos.com/


그가 뒤따라나와서

'장난이야'라고 붙잡아주길 바랐는데

아무리 발걸음을 늦춰도

그는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서러움에 눈물이 터진다.

그가 무심코 뱉은 말에 대한 섭섭함보다도

무방비 상태로 찾아온

사랑의 감정이 이만큼 깊어진 게

새삼 실감이 나서.

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이젠 진짜 얼마 남지 않아

말 한 마디, 한 걸음걸음이

너무 소중하고 애틋해서.


'더 좋아하는 사람이 손해다'라는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던 나인데,

그 말이 갑자기 격하게 공감되면서

너무 마음을 많이 준 탓인가-

결국 나만 상처받겠지- 등

말도 안 되는 부정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발길이 닿는대로

(허나 길을 잃으면 안 되니까 아는 길로)

한참을 걷는다.


이쯤되면 P씨도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날 걱정하고 있진 않을까-

이제 슬슬 들어가볼까-하며

알베르게 지하로 통하는 뒷문으로 들어간다.

식당에 놓인 소파에 멍하니 앉았다.


출처 : http://alberguesanmarcos.com/


그로부터 얼마 후,

내 이름을 있는 힘껏 부르며

눈 앞에 나타난 P씨.

다짜고짜 내 손목을 잡아끌며 밖으로 나간다.

얼마나 찾았는지 아냐며 나를 꾸짖는 그.

나는 갑작스럽게 든 안도감(?)에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날 애타게 찾았다니...


우리는 손을 잡고

마을을 크게 돌며

서로에 대한 마음을 털어놓는다.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컨트롤 안 되는 이 마음을,

처음으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한다.


그는 걱정되는 마음에

온 마을을 다 돌아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묘사해가며-

이 여자를 보았으냐고 물었단다.

(P야, 솔직히 말해. 너 이때도 울었지?)


너무너무 강철같이

강하게만 보이던 그가

얼마나 여린 마음을 가진 사람인지

처음으로 느꼈다.

이토록 감성 풍부한 남자는

아빠 다음으로 처음이다.


눈물 젖은 팔라스 데 레이에서의

길고 긴 하루가 저물어 간다.


오늘 펑펑 울었으니

내일 아침이면 쌍꺼풀이 실종되어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