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게 지하 주방에서
애피타이저로 라면과
메인으로 칠면조 요리를 먹고선
빵빵해진 배를 어루만지며
침대가 있는 3층으로 올라간다.
너무 배불러서 안 되겠다며
좀 걷고 오자는 말에
'너 혼자 가'라는 P씨.
이에 괜히 심술이 난 나는
'나 진짜 가?'라고 묻는다.
무슨 마음에서인지 그는
'응. 가 버려'란다.
가버리라고? 하..
라면을 잘못 끓인 실수때문에
안 그래도 마음 한켠에
속상함이 남아 있던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알베르게 밖으로 나왔다.
출처 : http://alberguesanmarcos.com/
그가 뒤따라나와서
'장난이야'라고 붙잡아주길 바랐는데
아무리 발걸음을 늦춰도
그는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서러움에 눈물이 터진다.
그가 무심코 뱉은 말에 대한 섭섭함보다도
무방비 상태로 찾아온
사랑의 감정이 이만큼 깊어진 게
새삼 실감이 나서.
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이젠 진짜 얼마 남지 않아
말 한 마디, 한 걸음걸음이
너무 소중하고 애틋해서.
'더 좋아하는 사람이 손해다'라는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던 나인데,
그 말이 갑자기 격하게 공감되면서
너무 마음을 많이 준 탓인가-
결국 나만 상처받겠지- 등
말도 안 되는 부정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발길이 닿는대로
(허나 길을 잃으면 안 되니까 아는 길로)
한참을 걷는다.
이쯤되면 P씨도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날 걱정하고 있진 않을까-
이제 슬슬 들어가볼까-하며
알베르게 지하로 통하는 뒷문으로 들어간다.
식당에 놓인 소파에 멍하니 앉았다.
출처 : http://alberguesanmarcos.com/
그로부터 얼마 후,
내 이름을 있는 힘껏 부르며
눈 앞에 나타난 P씨.
다짜고짜 내 손목을 잡아끌며 밖으로 나간다.
얼마나 찾았는지 아냐며 나를 꾸짖는 그.
나는 갑작스럽게 든 안도감(?)에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날 애타게 찾았다니...
우리는 손을 잡고
마을을 크게 돌며
서로에 대한 마음을 털어놓는다.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컨트롤 안 되는 이 마음을,
처음으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한다.
그는 걱정되는 마음에
온 마을을 다 돌아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묘사해가며-
이 여자를 보았으냐고 물었단다.
(P야, 솔직히 말해. 너 이때도 울었지?)
너무너무 강철같이
강하게만 보이던 그가
얼마나 여린 마음을 가진 사람인지
처음으로 느꼈다.
이토록 감성 풍부한 남자는
아빠 다음으로 처음이다.
눈물 젖은 팔라스 데 레이에서의
길고 긴 하루가 저물어 간다.
오늘 펑펑 울었으니
내일 아침이면 쌍꺼풀이 실종되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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