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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산티아고 순례길[프랑스길]

[2016/06/27] Day 25, 오랜만(?)에 걸어서, 비야프랑카로!

새벽 5시쯤 알람소리에 눈을 떴는데

험한 꿈을 꾸는 바람에 뒤척이다

540분쯤이 되어서야 완전히 깼다.

 

오늘 P씨의 몸상태는 어떠려나?

병원에서 24시간만 굶으면

괜찮아질 거라 했는데...

기대반, 걱정반으로 그를 흔들어 깨운다.

P씨는 한숨을 푹푹 쉬어대는

어떤 아저씨때문에 잠을 거의 설쳤단다.  

 

'평소 같으면 예민한 나도 못 잤어야하는데,

내가 너무 피곤했던 건가?

아니면 어느새 적응이 되었나?'

 

그에게 물어보니, 아직 배가 온전하진 않지만 걷겠단다.

마음이 너무너무 무겁다.

일단 본인이 의지를 보이니 걸어보고,

16km쯤에 위치한 카카벨로스(Cacabelos)에서 스탑하든지,

버스를 타고 점프하든지 결정하기로 한다.

 

전날 미리 찾아본 정보에 의하면,

오늘의 목적지인 비야프랑카(Villafranca del Bierzo)로 향하는 초입에서

두 갈래의 길이 나오는데,

그 중 하나는 가파르고 험하지만 조금 더 짧은 길,

다른 하나는 편안하지만 조금 더 긴 길이란다. 

 

예고대로, 초입에서 두 갈래의 길을 만났다.

그러나 막상 어느 길이 인터넷에서 말한

걷기 쉬운 길인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어리버리하게 헤매고 있으니까

어떤 현지인 할아버지가 오른쪽 길로 가라고 조언해주신다.

  그런데 느낌적인 느낌이 매우 찜찜한 게,

걷다보니 왠지 더 힘든 길로 들어선 것 같다.

우리는 농담섞인 말로

한동안 현지인 할아버지를 원망하며 걸었다.

 

 P씨가 오늘로써 4일째 굶고 있는데,

이대로 걷다가 혹시나 쓰러지면 어쩌나-

계속 불안한 마음이 든다.

곁눈질로 살펴본 그는,

정신력으로 버티며 걷고 있는 듯 하다. 

 

5km지점, 10km지점의 마을을 지나

출출한 우리는(정확하게는 '나만') 바에 들어선다.

 

 

이제는 지겨울 만도 한

커다란 샌드위치 하나를 주문하여 '살기 위해' 먹는다.

 다시 힘을 내어 걷기 시작해,

드디어 16km지점의 마을, 카카벨로스 들어선다.

P씨에게 상태를 물으니, 끝까지 걷겠단다.

 

 

그... 카카벨로스를 떠나

목적지인 비야프랑카까지의 8km

'역대급'으로 힘이 들었다.

마을이 가까워질듯 가까워지지 않아

우리의 애간장을 몹시도 태웠다.

 

 

 

 

체력과 정신력이 점점 고갈되어가,

마지막 4km는 정말 '오기'로 걷는다.

서로를 토닥토닥이며 걸은 끝에 우리는

드디어, 비야프랑카에 도착했다!!! 

 

마을은 굉장히 평화롭고 아름답고 정갈하다.

미리 알아둔 알베르게인 Albergue Leo로 간다.

첫인상이 불친절한 언니가 안내를 해준다.

(곧 그녀의 태도는 매우 호의적으로 바뀐다.)

 

 

드디어 순례자 여권 하나를 꽉 채웠다!

내일이면 새로운 여권을 발급받아야한다.

하아... 넘나 뿌듯한 것!

 

(순례길의 자랑거리, 빵꾸난 양말)

 

내가 세월아 네월아 씻는 동안

금세 씻고 나온 P씨는,

허기진 몸에도 불구하고 알베르게에 있는

매우 오래된 기타를 연주하였는데,

마치 스페인을 방문한 외국 가수처럼 '히트'를 쳤다.

불친절하던 알베르게 주인 언니는 물론

 몇몇 순례자들은 휴대폰으로 사진, 영상까지 찍는다.

 

주인 언니의 폭풍 칭찬 세례.

그녀는 P씨에게 일주일 간

무료로 여기에 묵으면서

매일 저녁 기타를 연주해달란다.

'아니 이 언니가 지금 내 남친한테!'를 외치고 싶은 걸 꾹 참는다.(농담) 

 

 

분명 1시간 전에

길에서 곧 죽을 사람처럼 걷던 P씨 맞나?

기력이 빠질 대로 빠졌을 P씨지만,

그 와중에도 연주하는 모습은 멋지다.  

 

우리는 근처 마트가 닫기 전에

점심으로 먹을 삼계탕 재료를 사온 뒤,

삼계탕을 만들기 시작한다.

 (실은 P씨가 다 만들었다.)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그 자신을 위해 흰 쌀죽도 만들어 식탁에 올린다.

 

 

 

', 까미노에서 삼계탕을 먹다니...'

너무너무 따뜻하고 든든하고 고소하고 맛있다.

  P씨는 조심스럽게

흰 쌀죽과 닭고기 한두점을 먹는다.

다시 한번,

'나도 요리 좀 해둘걸' 하고 후회하면서

한국 가면 꼭 요리를 배우던지 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만족스런 점심 식사 후,

우리는 한바탕 낮잠을 청한다. 

 

씨에스타를 한껏 즐기고는

다시 저녁 식사를 하기로 한다.

(종일 먹기만 하는 것 같지만 그..그렇지는 않다.)

P씨가 아까 요리해둔 삼계탕과 함께

샐러드와 샌드위치도 만들어 먹잔다.

 

 

요리초짜인 나는 그냥

그의 옆에서 사진이나 찍는다.

 

 

 

 

이렇게 간단한 것조차

내가 만들면 이상한 요리로 탄생하겠지ㅜ.ㅜ’

 

 

 

다행히 P씨의 몸 상태가 많이 회복되어

우리는 삼계탕과 샐러드, 샌드위치를 양껏 먹었다.

 

 

 

삼계탕을 옆에 앉아 계신 스페니쉬 부부에게

조금 드리니 너무 맛있다며 좋아하셨다.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P씨 말로는

그분들이 나의 식성에 놀라셨다고..하하

 

'(여리여리한) 겉모습만 보고

사람(의 식성)을 판단하면 안 된다'라는 말을

몸소 느끼셨을 거다.

 

 

P씨 덕분에 저렴한 가격에

건강과 맛과 영양까지 챙긴 식사를 했다.

이 남자 대체 못하는 게 뭐니ㅠㅠ

 

우리는 뒷정리를 하고서

소화시키기 위해 알베르게 문이 닫히기 전에

가볍게 산책한 뒤 돌아왔다.

오랜만에 걸었기에

더 의미있고 기쁜 하루였다.

순례 전에는 혼자 빡시게 걷는 게 목적이었는데,

느새 지금의 나는 반드시

그와 함께걷고 싶어졌다.

 

'우리, 세상 끝까지 함께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