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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산티아고 순례길[프랑스길]

[2016/06/24] Day 22, 산 위에 형성된 마을, 폰세바돈으로!

베드버그에 대한 불안감을 떨치지 못해,

나는 결국 1시간도 채 자지 못하고

아스토르가에서의 아침을 맞이하고 말았다.

 

왠지 모를 자괴감이 들었다.

 

내가 상상했던 순례길은

이번에 묵은 알베르게정도의 시설을 갖춘 숙소에서

불편하게 잠들고 깨고,

살기 위해 밥을 겨우 챙겨 먹고

자신과의 싸움을 하며 걷는 것이었다. 

 

순례길에 오르면서 무얼 그렇게 기대했길래,

이만큼의 시설을 갖춘 알베르게에서

위생 운운하며 불안감에 잠을 설치는 건지.

 

많이 내려놓았다고 하지만, 아직 멀었다.

오늘을 계기로,

편안함만을 좇기보다는

불편한 환경 속에서도

씩씩하고 꿋꿋한 마음가짐을 잃지 않고

순례를 이어 나가야겠다.

 

 

아침식사로 P씨표 건강 샐러드, 초코시리얼,

과일을 든든하게 먹고서

7시 쯤 알베르게를 나섰다.

 

힘겨운 상황일 수록 정신이 번쩍 난다고 했던가.

잠을 거의 자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P씨와 나 둘다 컨디션이 좋았다.

구름도 적당히 끼어 있어,

그리 덥지 않게 걸을 수 있겠다.

 

오늘 순례 후반부에 오르막의 산길을 걷는다기에

처음부터 등산화 끈을 느슨하게 하고 걸었는데,

그 때문인지 왼쪽 아킬레스건 부근이

등산화에 계속 닿아 조금 아파왔다.

이따 끈을 좀 조여야겠다-하고는

곧 산길일텐데 뭐-하면서 놔둬버렸다.

 

 

오늘 지나가는 첫 마을에서

B씨와 그 일행을 만났다.

(만나기 직전에 우리는 잡고 있던 손을 재빨리 놓았다. ㅋㅋㅋ)

언니는 20km지점의 시설 좋은 숙소에서 묵을 거란다.

일정을 여유롭게 짜 온 데다가,

여유를 즐길 줄 아는 언니, 좋아보인다.

그치만 언니도 후속 일정 상,

내일부턴 걷는 거리를 늘린다고 했다.

 

 

우리는 정말 씩씩하게 걸었고,

오르막 등산길이 나오기 직전의 라바날(Rabanal del Camino)이라는 마을에

Meson이라는 맛집이 있다기에 찾아갔다.

 

 

메뉴는 닭다리와 감자튀김이었는데,

레스토랑 외관에 비해 정갈하고, 음식도 맛있었다.

덕분에 든든한 에너지를 얻었다.

 

우리는 스퍼트를 올려 산길을 척척 걸어나갔다.

땀이 비오듯 흘렀지만 탄력을 제대로 받아

스피드를 유지하며 걸었다.

 

 

P씨와 나는 걷는 내내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나갔다.

P씨가 아버지와 산행에서 신기록을 세운 이야기부터

심오한 인생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오늘의 목적지인 폰세바돈(Foncebadon)에 도착했다.

 

 

산 위에 자리잡은 폰세바돈.

순례길이 만들어진 이후,

순례자들을 위해 알베르게가 하나둘 생기면서 형성된 마을이란다.

 

알베르게가 네다섯 개정도 있었는데,

어저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기에

비용은 조금 더 내더라도

조용하고, 시설이 잘 갖추어진 알베르게를 택했다.

 

내가 씻을 때쯤,

P씨가 가족과 통화하는 걸 얼핏 들었는데,

그에 대해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신 모양이었다.

 

순례길에서 처음 만난 여자에게

열심히 '호구짓'을 하고 있으니...

가족들이 걱정할 만도 하다.

 

나는 누군가에게 대접이나 호의를 받는 게

익숙하지 않고, 그걸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P씨가 내게 해주는 것들을 보면

참, 미안할 정도로 과분하다.

 

 

졸음이 쏟아져 온다.

우리는 각자의 씨에스타를 즐기기로 했다.

나는 낮잠을 택했고,

P씨는 둘이서 다니느라 어울리지 못했던

다른 순례자들과의 시간을 가지겠단다.

 

눈을 떴을 땐, 이미 저녁 7시였다.

우리는 저녁식사를 위해

숙소에서 추천해준 근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그러나, 저녁 7시에 영업 마감이란다.

 

이 조그마한 마을에 레스토랑이라곤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인데...

 

하는 수없이 우리는 어느 알베르게에서 제공하는

저녁 식사에 참가하기로 한다.

이 알베르게에 묵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순례자 메뉴가 아닌,

단품 메뉴 몇 개 중에서 고를 수 있단다.

선택의 여지없이 4유로짜리 병아리콩(chickpea)밥을 주문했다.

 

 

'이곳은 교도소인가.'

 

정말 맛이 없고, 한 마디로 그냥 별.로.였다.

병아리콩과 푸석한 밥,

만나면 안 될 것 같은 음식끼리 만난 느낌.

 

P씨가 안 되겠다며,

우리가 묵는 알베르게에 딸린 마트에서

샐러드와 냉동 식품을 데워 왔다.

이것으로 그나마 요기를 채울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숙소로 향하는데,

여전히 가시지 않는 허기를 달래기 위해

마트에서 컵라면 두 개를 샀다.

그런데 볶음컵라면인 줄도 모르고,

내가 소스와 물을 함께 넣는 바람에

컵라면이 이상해져버렸다.

 

마음씨 착한 P씨는

나에게는 몇 젓가락 주지 않고,

그 이상한 맛의 컵라면을 혼자 다 먹어버렸다.

 

'맛이 없을텐데ㅠㅠ'

 

 

소화시킬 겸 마을 주변을 잠시 거닐다,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끼니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

매우 찜찜한 기분이 들지만,

이런 날도 있는 거지-하며 잘 준비를 했다.

 

 

잠이 든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눈을 떴는데 P씨의 상태가 좋지 않다.

물어보니, 쭈뼛거리며 몸이 안 좋다고...

구토, 설사, 발열, 즉, 식중독 증상을 보였다.

나는 너무 당황스러워 어찌 해야할 지 몰랐다.

 

일단 너무너무 뜨거운 그의 몸을

찬수건으로 닦아주고 머리에 물수건을 올려주었다.

몸이 어찌나 뜨거운지,

차가운 물수건을 올린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수건이 금세 뜨거워졌다.

 

간호하다, 졸다를 반복하며

그렇게 초조한 마음으로 밤을 지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