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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산티아고 순례길[프랑스길]

[2016/06/22] Day 20, 충격적인 시골 마을, 산 마르틴

레온에서 일수로만 3일 간 휴식을 취하고

다시 길을 떠나려니 약간의 막막함이 있었다.

레온에서 묵은 첫 날에는,

꿀잠으로 에너지가 넘쳐났지만

오늘은 전날 과식한 탓에 속이 쓰리고,

또 피로가 도로 쌓인 것 같았다.

 

 

상큼한 과일 위주로 아침 식사를 한 뒤,

정들어버린 레온을 뒤로 하고

P씨와 나 둘만의 까미노에 다시 오른다.

 

 

10여분 걸었을까?

급작스럽게 오른쪽 종아리 앞부분이 땅긴다.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P씨에게 이를 알렸다.

 

이틀만에 다시 걷는 까미노인데,

초반부터 제동이 걸렸다.

그에게 미안하다고 하니,

그런 말 말란다.

 

나를 벤치에 앉히고는 다리 마사지에,

자상하게 달래주기까지 하는 P씨.

진통제(이부프로펜)를 한알 먹어보라며 권한다.

금세 괜찮아진 듯한 이 느낌은

플라시보 효과 때문일까,

그의 토닥임 덕분일까.

오늘도 그는 감동이다.


벤치에 앉아 눈물을 훔치는데

반가운 얼굴들이 이쪽으로 다가온다.

주비리에서부터 보았던 이탈리안 남자와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 만난 것으로 추정되는 그의 여자친구,

우리와 잠시나마 동행했던 언니 B씨와 그의 동행까지.

 

그들 모르게, 얼른 눈물을 닦아내고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는

오랜만에 조우한 기념으로 셀카를 찍는다.

 


한결 나아진 나는 P씨와 다시 힘차게 걷기 시작한다.

듣기만 들었지, 체감하지 못했었는데,

우리의 걷는 속도가 좀 빠르긴 한가보다.

금세 모든 이들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치고 나갔다.

 

걷다가 발견한 주유소 內 편의점에서

별다방 표 커피를 사서 들이키니,

졸음이 싹 달아났다.

 

13km쯤에 있는 마을을 지나다

순례자를 위해 간식을 제공하는 쉼터를 발견했다.

이곳에 멈춰 서서 방명록을 작성한다.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지친 몸을 쉬는 순례자들도 보인다.

 

 

순례자에게 베푸는 모든 것들이

정말 소중하고도 감사하다.

 

쉼터를 뒤로 하고 조금 걷다가

허기진 우리는 아점을 해결하기로 한다.

까미노 초반서부터 봐온

몇몇 순례자들의 얼굴을 보니 반갑다.

 

 

솔직히 이것들로 배가 차진 않지만,

속이 아주 좋진 않기 때문에

과식하지 않기로...^^

 

12시가 넘어가니

작열하는 태양때문에 정신차리기가 힘들다.

앞서 걸은 순례자들이 산 마르틴(San Martin del Camino)에서 조금 더 걸어가

호스피탈(Hospital de Orbigo)이라는 도시에서 묵으라고 추천해주었지만

우리는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산 마르틴!

크기가 아주 작은 건 아니지만

순례자 또는 여행자에게는 아주 심심하고,

막막한 마을이었다.

하나 있는 마트에는 물품이 거의 없고,

레스토랑은 딱 하나 있었는데,

그 마저도 담배에 쩔은 냄새가 진동하는

아재들의 노름터였다.

 

 

마트에서 대충 빵과 컵라면을 사서 먹고,

씨에스타를 낮잠으로 보냈다.

 

한참 자는데, 주인언니가 저녁을 먹으란다.

주방에는 가정식 메뉴가 차려져 있었다.

완.전.감.동.

8유로의 행복이었다.

 

 

우리는 저녁식사를 하면서

또 한번 진솔한 대화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였다.

어쩜 이리 짧은 시간에,

누군가와 오랜 시간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을 느낄 수 있을까.

신기방기할 따름이다.

 

둘만의 저녁 만찬 후,

맑아진 정신으로 정원으로 나간다.

주인 아주머니와 또 다른 순례자가 개와 놀아주고 있다.

낡아빠진 공을 뻥 차는데

어쩜 거리 조절을 알맞게 하는지...

 

'내가 찼다면 담장 너머 남의 집으로 넘겨 버렸을 거야.'

 

 

개가 너무너무 귀엽고 좋지만,

너무너무 무서운 나는

그저 멀찌감치 떨어져서 구경만 할 뿐이다.

 

 

P씨가 레온에서 산 엽서에 편지를 써보라고 권한다.

산티아고에 도착해서 읽어보면

감회가 남다를 것이라며...

 

잔잔한 노래를 틀어놓고는

'나에게 쓰는 편지'를 쓰기 위해 펜을 든다. 

 

 

문득, 가끔씩 나에게 편지를 써주면

정서적으로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내 안의 감정을 피하지 않고

솔직하게 끄집어내는 것.

그래야 뭘 해결을 하든

주변에 도움을 청하든 할 게 아닌가.

 

내면 성찰의 측면에서,

두렵지만 가끔은,

 나에게 쓰는 편지가 꼭 필요한 것 같다.

 

씨에스타를 한껏 즐겼음에도

오랜만에 걸은 탓인지 피곤이 몰려온다.

 

내일은 뜨거운 태양이 머리 위에 떠오르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하고 싶다.

 

피곤하지만, 완전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