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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산티아고 순례길[프랑스길]

[2016/06/17] Day 15, 규모는 작지만 깊은 온정을 느낀 까리온!

웬일인지 늦장을 부리다가

아주 느긋하게 9시반이 지나서야

배낭을 챙겨 나왔다.

(아마 오늘 걸어야 할 거리가 24.6km라, '이쯤이야' 얼마 안 걸릴 거라는 자만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알베르게에서 하몽 & 치즈 계란말이가 들어있는 샌드위치를 먹었다.

식욕이 붙을 대로 붙은 나는 그 큰 샌드위치를 다~ 먹었다.

놀라는 P씨.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잖아? 하하'

 

 

기분좋게 발걸음을 뗐으나

왼쪽 새끼발가락과 엄지 바깥쪽이 말썽이었다.

이를 재빨리 알아챈 P씨는

또 다시 동키서비스를 해준단다.ㅠ^ㅠ

그를 아끼는 누군가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분노할 일이다.

 

이 길이 지루한 길이라고들 하지만

그와 함께 하기에, 별로 그렇지도 않았다.

간간이 느껴지는,

조금은 춥지만 시원한 바람과 향기가

우리를 마냥 행복하게 해주었다.

 

하, 어느새 15일차라니...

이제 까미노의 절반 지점에 거의 다다랐다.

길 위에서 맺은 인연들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하기에

헤어질 것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너무 크다.


오늘도, 걷는 도중 많은 순례자들을 만났다.

초반부터 봐온 순례자들과는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이들과 대화를 많이 나눈 건 아니지만

스친 옷깃조차도 인연이니까!^^

 

까리온(Carrion de los Condes)까지

2km정도를 남겨두고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비바람이 강하게도 몰아치지만,

P씨와 함께라 괜찮았다.

이것조차도 행복!

 

 

까리온에 도착하였다.

뭔가 큰 것 같으면서도 작은 도시다.

우리가 오늘 묵는 '산타마리아 알베르게'는

수녀원에서 운영하는데

앞서 걸은 L씨가 추천해 준 곳이기도 하다.

 

(알베르게에서 제공하는 안내문)

 

무거워진 몸을 말끔하게 씻어내고는,

주린 배를 달래기 위해 근처 레스토랑을 찾다가

P씨의 안목을 믿기로 하고 우연히 어느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시금치라자냐와 까르보나라를 먹었는데

역시, 눈물나게 맛있다.

'넌 요리만 잘 하는 게 아니라 레스토랑을 고르는 안목까지도 어쩜...'


식사 후, 배가 불러 산책을 하다가

저녁 6시 반쯤 알베르게로 돌아왔는데,

로비에 수녀님들과 순례자들이 모두 모여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각 나라를 대표하여 몇몇 순례자들이

공연에 직접 참여했다.

P씨는 분명 캐네디언이지만,

한국인 손 들라는 수녀님의 말씀에 번쩍 손을 들더니,

얼떨결에 공연 제안을 받는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용기내어 기타연주 & 노래를 선보인다.

 

 

그.런.데.

많은 순례자들이 노래를 따라 부른다.

나는 잘 모르는 노랜데...

그에게 어떻게 사람들이 다 따라 부르는지 신기하다고 했더니,

많은 유럽인들이 알고 있는 노래라서 골랐다고 한다.

쎈쑤쟁이!!!

 

분위기가 어찌나 평화롭던지,

세계 각지에서 모인 순례자들이

비로소 하나가 되는 감격스런 순간이었다.

 

저녁 7시에 알베르게 바로 옆 성당에서

기타 공연이 있다 하여 부리나케 갔다.

 

 

고된 일정으로 지친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애써 들어올리려 하지만 처참히 패.배.했다.

집중해서 듣고 있는 P씨에게는 미안하지만,

너무 피곤한 관계로

우리는 공연 도중에 나왔다.

 

저녁 8시에는 순례자를 위한 미사를 드렸다.

포르투갈의 코임브라라는 도시에서 미사를 드린 적이 있었는데,

언어만 다를 뿐 미사의 형식과 순서는 똑같았었다.

스페인 미사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한국에서의 미사를 떠올리며

한국어로 기도문을 외었다.

성가를 부르시는 수녀님들의 곱디 고운 목소리에

엄청나게 큰 은총보따리를 받은 느낌이었다.

 

 

미사를 마친 뒤, 신부님께서 순례자들에게 안수를 주셨다.

벅차오르는 순간이었다.

몇몇 순례자들은 안수를 받을 때

거의 통곡수준으로 울기도 하였다.

 

'헉, 내가 신앙심이 부족한 건가?'

 

저녁 9시에 수녀원 알베르게에서 저녁식사를 한다기에 돌아왔다.

식사가 무료로 제공되는 만큼

메뉴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나름 애피타이저, 메인디쉬, 디저트 모~두 제공되었다.

 

여담이지만,

나는 수녀원 기숙사에서 1년 반동안 생활한 적이 있다.

기숙사에서 아침, 저녁 식사가 제공되었는데,

맛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건강한 음식만을 만들어주셨다.

 

이 곳, 수녀원 알베르게에서 제공해주는 식사도

메뉴자체는 그리 호감가는 것들은 아니었지만,

예상한 대로, 아주 건강한 음식들이었다.

 

 

 

내가 chickpea salad를 많이 받고선 남기는 바람에,

졸지에 P씨가 다 먹어주느라

그는 평생 먹을 chickpea를 다 먹은 것 같다며 질려 했다.

 

chickpea가 그런 밍밍한 맛인 줄 알았다면 조금만 받았을 거다.

 

까리온은 작은 도시지만

순례자들에게 참 따뜻하고도 극진한 대접을 하는 것 같았다.

특히, 순례자 미사, 음악 공연 등의 이벤트 덕에

다른 도시에서 하지 못한 경험을 잔뜩 쌓았다.

 

수녀님의 선처로

우리 둘은 다인실(?)이 아닌 4인실에 묵게 되었는데,

잠귀가 매우 밝아 예민한 우리는

그 덕에, 소음없이 안락하게 잠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