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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산티아고 순례길[프랑스길]

[2016/06/14] Day 12, 부르고스에서 셋의 우정을 아로새기다

까미노에서의 하루하루가 제법 익숙해지고,

오픈된 숙소에서 침낭을 깔고 자는 것이 꽤 적응되었나보다.

 

숙면을 취하던 중,

새벽 5시에 보이스톡이 걸려 온다.

 

'아, 한국에서의 원치 않는 전화다.'

 

자고 있는 순례자들 틈을 빠져 나와

복도에서 1시간 가까이 통화를 한다.

 

내가 한참동안 돌아오지 않는 사이,

P씨와 Y씨는 준비를 마치고

배낭을 챙겨 1층으로 내려가며

걱정스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이 상황이 싫었다.

거룩하기만 할 줄 알았던 까미노인데...

한국에서 끝내고 왔어야 할 일을 미루다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이 후회스러웠다.

 

통화를 얼른 마무리 짓고,

서둘러 순례 채비를 마치고 내려왔다.

 

어제 알베르게에서 간단히 샀던

바나나, 요플레, 빵을 폭풍 흡입하고

오늘의 목적지인 부르고스(Burgos)로 출발!

 

 

그날 그날의 목적지를 정하는 기준은,

순전히 Camino Pilgrim 어플의

추천 일정에 충실하여

그대로 따른 결과이다.

 

오늘의 목적지는 부르고스지만,

그곳까지 닿을 동안

여섯 개의 마을을 지나게 된다.

 

8km쯤 걸었을까?

두 번째 마을을 지나면서,

나름 괜찮아보이는 레스토랑을 발견했다.

아침을 대충 때운 우리는,

이 곳에서 제대로 먹고 가기로 한다.

 

일어나자마자 세수만 하고 바로 출발한 것 같은

부지런한 순례자들이

이곳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맛있어 보이는 메뉴 세 가지를 시켜

아주 든든하게 식사를 했다.

 

에너지원을 공급했으니,

다시 힘을 내서 발걸음을 뗀다.

 

 

이제는 쳐다만 봐도 웃음이 나는 두 남정네들.

혼자서 고행길을 걸을 생각으로 온 나인데,

어떻게 이렇게 천사(자칭 호구)같은 사람들을 만나

열흘 넘는 시간동안 함께 걷고 있을까?

 

내가 인복이 많은 건 알고 있었지만,

인복이란 말로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은,

엄청나게 소중한 '인연'을

스페인 땅, 까미노 위에서 만났다.

 

이들이 있기에

너무나 행복하고 즐거우면서도

지나간 나날들이 벌써 그리워지려 한다.

 

내리막을 한참 걸어 내려오다 보니,

저 멀리 커다란 도시가 보인다.

길도 갑자기 도시스러워져,

오늘 까미노의 후반부는

자연을 벗 삼는 게 아닌,

차도를 벗 삼아 걸어야 했다.

 

공장, 차, 매연...

그리 달갑지 않은 것들이지만

이 또한 주어진 길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다.

 

셋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걷다 보니,

드디어! 부르고스에 도착했다.

표지판을 따라 겨우겨우 찾아가니,

전에 없던 엄~청나게 큰 규모의

세련된 알베르게가 우릴 맞아준다.

 

배낭을 풀고 씻고서는

그냥 평소처럼 로션만 바르고 나설까 하다가,

진짜 오랜만에! 아이라인을 그렸다.

(나름 큰 도시에 왔으니까...하하하)

 

우리 셋은 투어리스트 센터에 찾아가

관광 지도와 함께 그에 대한 설명을 (캐네디언 P씨가) 듣고,

추가로 레스토랑 몇 군데를 추천받아 나왔다.

 

P씨의 리드 하에,

부르고스의 전망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으로 걸어 올라갔다.

 

 

바람이 몹시 불어 조금 춥기도 했는데,

기분만큼은 아주 좋았다.

 

부르고스에는 대성당을 비롯하여

볼거리, 즐길거리가 꽤 많아보였다.

한나절만 머물기엔 아쉬울 듯 하지만,

빠듯하게 일정을 짠 나로서는

단 하루도 일정에 차질이 생겨선 안 되었다.

 

'좀 더 일정을 여유롭게 짤걸...'

 

 

내가 대성당 사진을 찍으려 하자,

두 팔을 올려 방해하는 Y씨.

 

'이 눔을 콱 그냥! ㅋㅋㅋ'

 

우리 셋은 깔깔거리며 도시를 거닐었다.

 

 

시에스타임에도 불구하고 운영 중인

바에서 간단히 타파스와 맥주를 먹고,

 

5시에 다시 오픈한다는 대성당에 들어갔다.

 

 

 

한국에서 성가대 활동을 하고 있기에,

나의 눈에 꽂힌 것은 럭셔리(?)한 성가대석.

그리고 그 위쪽에 위치한 파이프 오르간!

 

순례 전의 여행 중에 이미 많은 성당을 본 데다가

이 대성당을 둘러보면서는

어떤 설명도 곁들여지지 않았으므로

그냥 한번 빙 둘러보다 나왔다.

 

참, 오늘 저녁에 알베르게 앞에서

순례자들이 모이기로 했단다.

단체 사진을 찍는다며...

 

 

 

시간 맞춰 알베르게 근처로 오니,

생각보다 많은 순례자들이 모여있다.

초반부터 까미노에서 본 얼굴들이 많이 있어

너무나 반가웠다.

 

한참동안 단체사진을 찍으며

왁자지껄하게 시간을 보내다,

배가 고파진 우리는

어느 블로그에서 추천한 레스토랑으로 갔다.

사람이 정말 많았는데,

우리가 착석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만석이 되었다.

 

 

허겁지겁 맛 보느라

사진은 메뉴 하나밖에 찍지 못했지만,

고심 끝에 주문한 음식들은

모~두 대.성.공.이었다!

 

P씨의 안목이 남다른 것인지,

운이 특별히 작용한 것인지

까미노에서 찾아 들어간 음식점마다 맛있다.

 

아주아주 만족스런 저녁 식사 후, 

2차 드링킹을 위해 알베르게 근처 바에 들어왔다.

 

Y씨가 내일 점프를 하겠단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오늘은 그와 함께 하는 마지막 밤이다.

 

 

까미노에서 처음 맛 보고 반해버린

쿠바 리브레를 마시며,

우리 셋의 마지막 날을 기념했다.

 

알베르게로 돌아왔는데,

Y씨는 다른 순례자들과 술을 더 할 생각인가보다.

 

P씨와 나는 둘이서 대화를 나눌 곳을 찾았다.

뭐가 그리 부끄럽고 두려운 건지

인적 드문 곳을 찾아보지만 쉽지 않다.

결국 계단 중간에 걸터 앉는다.

 

 

그 어느때보다도 진지하게,

우리 사이에 미뤄왔던 이야기들을 주고 받는다.

우리는 산티아고까지,

그러니까 끝까지 함께 걷기로 약속했다.

내일부터 시작할 둘만의 '러브 인 까미노'가

구두로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하, 그가 너무 좋아서

눈을 쳐다보는 것조차 어렵다.

 

시간이 늦어 자려고 누웠는데

자꾸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참기가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