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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산티아고 순례길[프랑스길]

[2016/06/12] Day 10, 끔찍한 추억을 남겨 준 벨로라도!

새벽 3시부터 자다깨다를 반복하며 잠을 설쳤다.

결국 4시 반쯤에 배낭을 먼저 챙겨

식당으로 내려왔다.

일행들을 위해 계란을 삶고,

아침 식사를 준비하면서,

그들이 정말 그만둔다면 어쩌나 걱정하며

초조하게 시계만 쳐다봤다.

 

'제발, 마음이 바뀌었어라.'

 

해가 눈부신 얼굴을 드러내며 떠오름에 따라

순례자들이 하나둘씩 까미노에 오를 준비를 한다.

 

나의 간절함이 그들의 마음에 닿은건가?

더 이상 걷지 않을 것 같던 일행들이

어느새 준비를 마친 채

식당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기쁜 마음을 애써 감추려 하지만,

레알 너어어어어무 기쁘다.

 

오늘은 일행 중 누구도 점프를 하지 않는단다.

발 상태는 여전히 최.악이었지만,

각자의 고통과 열심히 싸워가며 걷는다.

 

P씨는 초반부터 굉장히 빠르게 걷는다.

그를 제외한 우리 셋은 따로 또는 같이 걸으며

고통을 승화시키고자 크게 노래를 불러 보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쉬기도 하고,

소리를 냅다 지르기도 한다.

 

태양이 작열하는 논길을 지나,

도로와 마주했다.

어느 레스토랑 테라스에 P씨가 앉아있다.

실제 직업이 의사인 순례자에게 치료를 받았단다.

우리도 한 자리씩 차지하고서는

Y씨는 간호사 출신 순례자의 도움으로,

나는 나의 전담 의사선생님 P씨의 도움으로,

각자 아픈 부위에 응급 처치를 받는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 고생길에 오른 걸까.

사서 고생한다는 게 바로 이런 걸까?'


미련하다할지 모르나

자신과의 싸움 끝에 하루의 까미노를 마치고 나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의

엄청난 행복감에 젖는다.

또한 이를 함께 나눌 사람들이 있기에

그 행복은 두 배가 된다.

 

벨로라도(Belorado)라는 마을에 도착하였다.

우리가 들어간 알베르게는

누군가 불친절하다고 평가한 곳인데,

내가 느낀 바로는

시설도, 직원의 친절도도 만족스러웠다.

 

나는 원 없이 오래 샤워를 했다.

손 빨래까지 열심히 하고 나니,

거의 1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로비에 내려가니,

다들 피곤하지만 행복하게

오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까미노에 오른 뒤,

처음으로 가족들과 통화를 했다.

물론 통화 상태가 좋진 않았지만,

현재 나의 상황, 심리 상태 등을 낯낯이 말씀드렸더니,

어머니께선 연신 조심하라신다.

 

통화를 마치고 나니, 배가 고팠다.

우리의 셰프 P씨가 초리조 파스타를 해준단다.

마트에서 필요한 재료를 장 봐온 뒤,

Y씨의 보조 아래

멋진 요리가 탄생했다.

 

 

분명 양이 엄청 많았는데,

어느새 초토화된 냄비. 

솔직히 내가 거의 다 먹은 듯...헤헤..

 

로비에서 우리만의 맥주 파티를 열었다.

나와 L씨는 맥주를 마시고,

진정 술을 즐길 줄 아는 P씨와 Y씨는

알베르게 주인아주머니가 준

위스키 종류인지 뭐 시긴지

아주 독한 술을 섞어 마셨다.

 

술 기운을 살짝 빌려 용기를 내어,

난 오늘, 한국에서 이곳까지 가지고 온

묵직한 마음의 짐 하나를 덜어냈다.

후련함 반, 허탈함 반.

 

'진작 해결하고 왔어야 하는 건데...'

 

나의 하소연과 땡깡(?)은

일행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마음씨 착한 그들은 다 받아준다.


P씨가 광장으로 가서 버스킹을 하겠단다.

버스킹에 로망이 가득한 나는

벌떡 일어나 그를 따라 나섰다.

 

기분좋게 광장의 한 가운데로 가서,

P씨 옆에 나란히 앉아

그의 연주를 감상했다.

그는 내게 노래 한곡 뽑을 것을 권했지만

쑥쓰러워 선뜻 부르지 못했다.

(사실 팝송 중에 가사를 외운 게...하하)

 

그때, 중년의 남성이 다가와,

P씨에게서 치지도 못하는 기타를 가져가서

장난스럽게 뚱겨대더니,

우리에게 술을 대접하겠단다.

 

맥주를 사오겠다며 사라져서는

한참 뒤에, 두 여자 아이를 데리고

(그는 딸들이라 칭했다.)

병맥주 2개와 함께 나타났다.

아저씨는, 오늘 당신의 집으로 초대할테니

자고 가란다.

경계심이 잔뜩 발동하여 수차례 거절하였지만,

그는 끈질기다.

 

결국, P씨는 기지를 발휘하여,

기타만 숙소에 두고 다시 오겠다고 하였다.

휴, 그제야 우릴 놓아 주는

질 나쁜 아저씨.

 

알베르게로 돌아왔는데

P씨는 상기된 표정으로

정말 큰일날 뻔 했다고 말한다.

알고보니 맥주 하나에 최음제를 탔는데,

그걸 마셨다는 그.


P씨는 어지럼증을 호소하며

산책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를 따라 나서서,

광장에서 떨어진 마을 외곽 쪽으로

걷기 시작하였다.

 

그는 구토 증세를 보이며,

곧 쓰러질 사람처럼 위태로웠다.

너무너무 걱정되고

속상하고 마음이 아팠다.


한참이 지나서야 진정이 된 그와

조금 더 걷다가

가까운 벤치에 나란히 앉아

다정하게 둘만의 이야기를 나눈다.


다시 한번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지금까지 그래왔기에,

늘 평화로울 줄만 알았던 까미노에서

이런 험악한 일을 겪다니...

 

다시 한번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우리는

긴장이 풀린 탓인지

알베르게로 돌아와서는

아주 깊은 잠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