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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산티아고 순례길[프랑스길]

[2016/06/10] Day 8, 넘나 힘든 나헤라 가는 길!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밤새 신나게 노는 사람들 탓에

잠을 제대로 설쳤다.

어제 코피까지 한 바가지 쏟은 나는

오늘의 까미노가 걱정되었다.

 

아직까지 점프(걷지 않고 다음 도시까지 버스로 이동)라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나이기에,

또한, 살면서 한 번도 쓰러져 본 적이 없는 나이기에,

분명 잘 걸을 수 있을 거라고

마음을 굳게 먹고 배낭을 챙긴다.

 

한데 섞여 버린 많은 사람들의 짐 속에서

나의 것을 골라 챙긴 뒤,

우리 일행의 스틱을 양손 가득 집어 들고 식당으로 향한다.

 

큰 도시에는 꼭 중국인 마트가 있다.
팜플로나에 이어 큰 도시에 머무르게 되었기 때문에

어제 L씨가 수고하여 사온 라면을 끓여 먹었다.

 

 

매콤한 냄새가 익숙지 않은 외국인 순례자들은

너도나도 할 것없이 콜록콜록 기침 세례다.

미안함과 민망함이 섞인 눈빛을 그들에게 보낸다.


출발이 조금 늦어졌다.

Y씨의 발 상태는 최악이었는데,

그는 고민 끝에 점프하기로 결정하였다.
나는 점프를 하기는 싫은데 배낭은 무거워,

조금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Y씨에게 내 배낭을 맡겼다.

그는 흔쾌히 내 배낭을 받아들고는 다음 마을에 가 있겠단다.

 


마치 이른 아침, 우리나라의 홍대 거리를 보는 듯,

로그로뇨의 길거리는 매우 지저분했다.

우리는 물 한 병씩을 사 들고,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걷기 시작했다.


오늘은 29.6km의 장거리를 걸어야 한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걸었음에도,

불충분한 수면+좋지 않은 컨디션과 발 상태로 인해

장거리를 걷는 것이 힘에 부쳤다.

 

 


12km쯤 걸었을 때,

뜬금없이 J씨가 소리쳤다.

 

"Y씨다!"


응??????

뒤를 돌아보니, 맙소사!

Y씨가 앞뒤로 크디 큰 배낭을 짊어진 채,

곧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난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그에게로 달려가 내 배낭을 받아 들었다.
너무너무 미안했다.

까미노에서 누군가에게 이런 민폐를 끼치다니...
그는 앞뒤로 배낭을 메니

오히려 균형이 맞아서 덜 힘들더라며 너스레를 떤다.

 

'이런 착해 빠진 녀석!'


우리 일행은 곧 나바레떼(Navarette)라는 마을에 들어섰다.

마트에서 각자 먹을 간식을 사서 먹으며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다.
누구 하나 예외랄 것 없이 넉.다.운...


B씨는 이 마을에서 스탑하겠다고 하고,

Y씨는 더 이상 걷기 어렵겠다며 버스를 타겠단다.

결국 L씨, P씨,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남은 17km를 걷기 시작했다.

 

 


나헤라(Najera)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다 왔다!!!!!!!"

 

누군가 마지막 4km가 가장 힘들다고 했던가?
레.알. 그것은 진리였다.
만보기를 보니 이미 29.7km가 넘었는데도

구글맵에서는 아직 2km나 남았단다.


그때, 대형 마트가 보인다.

우리는 점심으로 먹을 냉동 피자, 과일, 음료 등을 사서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어 걸었다.

 


알베르게에 다 다를 때쯤, 저 멀리서 우리를 향해 양팔을 벌린 채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Y씨가 보인다. 힘이 난다.

 

 

그를 만나 알베르게에 배낭을 풀고

샤워를 하며 쌓인 피로를 한꺼풀 덜어냈다.

 

빨래를 한 뒤, 알베르게 앞 벤치에 앉았다.

P씨가 나의 발 상태를 묻는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 게 어색한 나지만,

치료는 도저히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

아니, 용기가 나지 않아서

미안함 반 고마움 반으로

오늘도 그에게 치료를 받는다.

게다가, 발 마사지까지 정성껏 해준다.

 

P씨와 나는 마을을 한바퀴 돌기로 한다.

 

 

 


짧은 기간이지만 거의 24시간을 함께 지내는 우리는

이미 정이 들대로 들었고,

서로의 내츄럴한 모습까지도 낱낱이 아는 친근한 사이가 되었다.


모든 일행들에게 친근감이 들지만,

P씨에게는 그 이상의 감정이 들어 혼란스럽다.

나는 이러한 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 하면서도,

굉장히 조심스럽다고 했다.

여행지에서의 이성에 대한 환상은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얼마 가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P씨 또한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P씨는 캐네디언, 나는 한국인이라,

관계를 발전시키기엔 쉽지 않은 상황이다.

혼란만 남긴 채 산책이 끝났다.

 

 

우리는 저녁으로

냉동 피자 다섯 판을 데펴 먹은 뒤,

우리만의 맥주 파티를 열었다.

여전히 술을 자제하는 L씨와

술을 좀 즐겨보고 싶지만 주량이 따라주지 않는 나,

그리고 진정 술을 즐길 줄 아는 세 남정네들.

 

까미노 8일 째.
피레네 산맥을 넘으며 만났던 순례자들을

이 마을에서, 저 마을에서 또 만난다.
우리는 서로 "와, 너 여기까지 왔구나!"라며

반가운 마음을 담아 가벼운 포옹을 나눈다.

 

까미노에서의 소중한 하루가 또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