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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산티아고 순례길[프랑스길]

[2016/06/13] Day 11, 순례자들의 웃음꽃이 가득 핀 아헤스 가는 길!

벨로라도에서 맞는 아침.

(적당히 마시는) 술이 발휘하는 마력은 대단하다.

예민예민한 내가 모처럼만에 꿀잠을 자다니

 

우리가 머문 침대 근처에

내 머리 높이쯤에 나무기둥이

가로로 길게 놓여 있다.

이 곳에 단 하루 머무는 동안

몇 번을 박았는지 모른다.

정신 차리라는 무언의 신호인가?

 

빠뜨린 것 없이 배낭을 꾸린 후

1층 로비로 내려왔더니,

 

P씨가 부지런히 아침을 차려놓았다.

메뉴는 샌드위치와 쥬스!

넘 맛있어서 감동이 밀려온다.

오늘도 27.4km라는 결코 만만치 않은 거리를

걸어야하기 때문에 와구와구 배를 채웠다.

 

그.런.데.!!!

큰 형님(?)인 L씨가 버스를 타고,

부르고스(Burgos)라는 도시로 점프하겠다고 한다.

우리가 오늘 도착하게 될 아헤스(Ages)보다

하루 앞선 일정이다.

발 상태와 남은 일정을 고려하여 한 결정이라며

그는 너무나 결연한 의지를 보인다.

 

Y씨는 함께 점프하겠다고 하는 반면,

P씨는 걷겠다고 한다.

 

엄~청나게 갈등되었다.

나도 발 상태가 온전하지는 않은데...

버스를 타고 큰 도시로 이동해서

여유를 가지느냐,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걷느냐.

 

결국, 난 점프하지 않고

P씨와 함께 걷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되면 L씨, Y씨와는

일정 상 하루의 차이가 생기므로

우리가 점프하지 않는 이상

더 이상 동행하지 못하게 된다.

 

너무너무 아쉽지만,

우리는 서로의 결정을 존중하기로 했다.

 

 

P씨와 둘이서 걷기 시작한다.

뭐랄까,

조금은 허전한 기분이 들지만

그 빈자리를

설렘이 가득 채워주었다.

 

물집 잡힌 발에서

통증이 느껴지지만

걷다보니 괜찮아지기도 했고

무엇보다!

출처 모를 힘이 샘 솟아,

빠른 속도로 오르막의 끝에 다다랐다.

 

 

마련된 벤치에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의 순례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휴식을 취하고 있다.

우리도 잠깐 쉬면서

그들과 담소를 나눈다.

 

주로 아버지뻘 이상의 어르신들과

어울릴 기회가 많았던 나.

스무살 때 독일을 여행할 때도,

몇 주 전 포르투갈을 여행할 때도,

국적을 불문하고 5, 60대 할아버지들이

나를 예뻐해주신다.

나 또한 그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이

불편하지 않다.

또래와의 대화와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달콤한 휴식 후, 걷기 시작하면서

다시 찾아온 발가락의 통증을 한껏 즐겨준다.

 

 

얼마쯤 지났을까.

갑자기 P씨가 직감적으로 뒤를 돌아본다.

 

"Y씨다!"

"거짓말"

"저기 봐봐!"

"억, 진짜 Y씨다!"

 

점프하겠다던 Y씨가 미친 속도로

우리가 있는 곳까지 왔다.

점프하겠다더니... 기특한 녀석.

눈물겹도록 반가운 마음을 숨길 길없이

함박웃음과 함께 달려가 포옹을 나눈다.

 

 

산 후안(San Juan de Ortega)이라는 마을에 다다랐다.

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에서 머문단다.

 

일단 우리는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쉬기로 한다.

시원~한 Aquarious를 꿀꺽꿀꺽 마시고 나니

조금 정신이 돌아온다.

 

 

우리는 이 곳에서 식사만 한 후,

오늘의 목적지인 아헤스까지 가기로 했다.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는데

또 한번 P씨가 어떤 직감이 들었는지

밖으로 나가더니,

L씨를 데리고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다시 한번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그러나 반가움도 잠시,

식사를 함께 하자고 하니

먹지 않고 예정대로

쉬지 않고 걸어가

부르고스로 가는 버스를 타겠단다.

 

그렇게 L씨와 진짜, 안녕을 고했다.

언젠간 또 만날 수도 있을 거란

작은 희망의 씨앗을 남긴 채...

 

 

내리막 길, 기나긴 숲, 그리고 평원을 지나

작은 마을, 아헤스에 도착했다.

이미 많은 순례자들이 도착해있었다.

이제는 습관처럼

베드를 배정받아 배낭을 풀고, 씻고,

손 또는 세탁기를 이용해

땀에 쩔은 빨랫감을 깨끗하게 조리(?)한다.

 

가장 씻는 시간이 긴 내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서

로비로 내려가니,

P씨와 Y씨는 이미 맥주를 들고 있다.

 

어김없이 발을 치료하고,

알베르게 內 바에서 판매하는

메뉴를 시켰다.

식욕이 비정상적으로 늘어버린 나는

먹어도 먹어도 속이 채워지지 않았다.

살면서 이만큼 식욕이 불은 적이 있었나 싶다.

 

 

시간을 보니, 아직도 초저녁.

우리는 맥주와 탄산음료를 마시며

한가하게 시간을 보낸다.

이제는,

별 이야기를 하지 않을 때

찾아오는 정적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사실 우리 셋은 걷는 속도가 비슷해,

다른 멤버들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 걷고,

장난도 치고,

노래도 부르고,

이야기도 많이 나누어 왔다.

 

이들과 함께 한 시간은

어떻게 보면 '고작' 11일인데,

사회에서 맺은 어떤 인연보다도

너무너무 편하고 좋다.

 

벌써부터

헤어지는 게 섭섭한 이 기분.

 

 

혼자 산책에 나선다.

마을을 천천히 돌면서

생각을 정리한다.

한국에서는 가지지 못했던

여유를 한껏 누리며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

특히 지금의 행복에 감사한다.

 

 

한참 생각에 빠져 있을 즈음

P씨가 이쪽으로 온다.

그는 물론 좋은 친구이기도 하지만,

친구 이상으로

조금 더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자꾸 이성보다 감성이 앞선다.

나 스스로 현실적인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분명 비현실적인 연애는

다시는 하지 않으려 다짐했는데...

 

하지만 내 마음의 답은 이미 정해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