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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산티아고 순례길[프랑스길]

[2016/06/18] Day 16, 푸른 정원이 딸린 알베르게가 있는, 테라디요스!

부지런히 일어나 준비를 하고,

어제 사둔 바나나와 요거트로 요기를 채운 뒤 나왔다.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다음 마을까지 17km라 한다.

이 말은, 이곳을 출발하여

17km를 갈 동안 사먹을 데가 없을 거라는 것.

우리는 근처 빵집에 들러

바게트빵과 피자빵을 사서 출발했다.

 

 

자욱하게 낀 안개는 우리가 걸어갈 길에

엄청난 신비감을 조성해주었다.

가시거리가 짧아,

앞뒤로 누가 있는지 알기 어려웠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우리는 손을 꼬옥 잡고 힘차게 걸었다.

 

한없이 반복되는 지루한 길...

하지만, 자스민 꽃향기에 취해, 서로에 취해

지루한지 모르고 걸었다.

우리는 걸으면서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기분 탓일지 모르겠지만,

그의 머리 위에 가득했던 먹구름이 한겹 걷힌 듯 했다.

 

(이때 나누었던 대화는

내가 암암리에 준비한

'P씨 자존감 높이기'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1년 반 전까지,

나의 자존감은 바닥을 쳤었다.

나 자신에게 너무 가혹했다.

실수한 것에 대해 한없이 채찍질 하고,

뭔가를 잘 해냈을 때조차도

자만하지 말자, 겸손하자며

자존감을 깎아왔다.

 

지금의 나는

(취업 탓도 분명히 있겠지만!)

좋은 사람들을 만나

긍정적인 영향을 받으며

스스로에게 적당히 채찍질하며

자타에게 사랑받는 존재다.^^

 

Anyway!

 

17km를 걸어가 도착한 마을에서

아점을 먹으며 쉬어가기로 한다.

 

 

'넘나 맛있는 것!'

카레맛 나는 치킨리조또와 샌드위치,

갈증을 달래줄 음료까지!

 

 

에스텔라 이후로 잘 먹기 시작하여

지난 한 달간, 여행하며 걸으며 빠졌던 살이

다시 빠른 속도로 차오르고 있지만,

이곳에선 식단 조절이고 뭐고,

일단 살기 위해 먹고 보자는 심리다.

 

다시 8km를 열심히 걸어갔다.

어제보단 발 상태가 좋았다.

지나가는 마을에서 아이스크림을 팔기에

하나씩 사서 당을 보충한다.

 

 

서로에게 의지해가며,

긍정에너지를 발산하며 걸으니

(살짝 오바 보태어)

26km쯤이야 거뜬했다.

 

마을인지도 모르게

도로 바로 옆에 형성되어 있는,

테라디요스(Terradillos de los Templarios)!

 마을이 참 작고 조용했는데,

Jacqes de Molay 알베르게의 시설은 아주 좋았다.

 

 

너무 지친 나는 1시간가량 눈을 붙인 다음

콧노래를 부르며 한참동안 씻고

손빨래를 하기 위해 정원으로 나왔다.

 

정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는데,

P씨는 그 사이 벌써 맥주를 몇 병이나 해치웠다.

덜덜덜...

약간 취기가 오른 것 같아 보였지만
딱히 주사가 없는 그이기에 할 말 없음ㅋ

 

비가 오고 추워서 이틀 내내 빌려 입었던

P씨's 방수바지를 열정적으로 빨고선

자랑하기 위해 '뙇!' 보여주었더니

방수바지를 빨면 어떡하느냐,

방수기능이 떨어졌다며 타이른다.

미안하기는 한데,

화내는 모습조차 사ㄹ..좋다.

 

빨래를 널고 나니,

배가 출출해져 온다.

센스만점 P씨가 씨에스타가 시작되기 직전에

수제버거를 시켜 놓았단다.

 

 

과연, 사이즈가 장난 아닌 버거와

오랜만에 만난 San Miguel을 마셨다.

많은 순례자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미안하지만, 내가 다 먹을 거야.'

 

P씨와 나 사이에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우리의 앞날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같이 엉엉 울기도 했지만,

지금 순간순간에 충실하며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기로 한다.

 

정말 인연이라면 어떻게든 만나게 되겠지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