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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광란의 수제비 만들기

8월 3주 간의 캐나다 여행('여행'이라 쓰고 '살이'라 읽는다) 후 극심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나는 매일매일 끼니를 대충 때우기 일쑤였다.

이를 안타까이 여긴 밤비는
제대로 해먹으라고!
옆에 없는데 그렇게 대충 먹으면 속상하다고! 타일렀다.
혼이 난 것에 대해 서럽기도 하고 생활에 활력도 안 생겨서 그 후로도 대충 때우다가, 일요일 점심 때 '냉장고 파먹기'에 대한 의욕이 급 샘솟았다.

쉐프 저리가라인 밤비에게 우리집 냉장고에 있는 재료들을 말해주니, 수제비를 해 먹으면 좋을 것 같단다.

자취 시절 수제비를 종종 해먹었던 나는 자신감을 보였다.
그러나 그 말이 민망스럽게도 1부터 100까지 밤비가 일러주는 대로 하였는데, 그 마저도 아주 헤매었다.

밀가루와 물을 4:1 비율로 하여 반죽을 만들란다.
1인분이라 밀가루는 200g정도, 물은 50g정도로 넣고 마구 치댄다.

끈덕거리지 않게 수차례 치댄 뒤 랩에 싸서 냉장고에 넣어 둔다.

냉장고에서 반죽이 숙성될 동안 육수를 만들기로 한다.

적당량의 물에 다시마와 멸치, 칼등으로 한번 콱 찧은 마늘, 양파 등을 넣고 푹 끓여주었다.

곧 외출해야 하는 나는 시간이 별로 없어 20분 뒤 반죽을 꺼내어 먹기 좋은 크기로 얇게 손으로 떼어 육수에 넣었다.

국물을 떠 먹어보니, 음.. 넘나 싱거운 것!
밤비에게 SOS 요청하니,
간장 2, 식초 1, 참기름 0.5, 고추가루 0.5, 고추 1의 비율로 양념장을 만들어 둔 뒤 조금 넣어 국물 맛을 내란다.

요리왕중왕초보인 나는 그 양념장을 몽땅 육수에 들이부었고 여기서 나의 수제비는 사실상 끝이 났..

육수 색이 거무잡잡하게 변함과 동시에 나는 망했음을 느꼈다.
밤비는 어떻게 그걸 다 넣었냐며, 양념장은 원래 만들어놓고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넣어 쓰는 거란다.
'괘..괜찮아 이러면서 배우는 거지...'라며 위로를 해보지만 난 화가 많이 났다 ㅋㅋㅋㅋ

오늘의 첫 끼니를 이래 망치다니..
육수를 몽땅 버리고, 수제비는 잠시 채에 담아 두고, 다시 육수를 만들었다.
결국 다시마, 멸치, 빻은 마늘에 소금 간만 하고 차갑게 식어버린 수제비를 다시 넣고 5분정도 끓인 뒤 불을 껐다.

맛이 참... 그러했다.
옆에 계시던 아버지께서 맛을 보겠다셔서 안 된다고 극구 말렸으나 굳이 숟가락을 들고 이쪽으로 오신다.
아버지께 드시고서 아무말도 말아달라 당부해보지만 "짜" 한 마디 하시고는 유유히 방으로 들어가셨다. 하하

입맛을 버린 나는 그날 저녁 동네서 수제비를 사먹었다.